교실 밖 이야기/Booketlist

09. 프리즘/손원평 지음

gongchemi 2020. 11. 15. 14:44




학교 사서쌤께서 추천해주신 책.
이 책을 먼저 읽으시고는, 일의 기쁨과 슬픔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내가 떠올랐다는 말씀을 하시며 추천해주셨다.
단숨에 2장까지 읽어내려갔고, 그 이후로도 술술 읽혔다.
이 책을 읽어나갈수록 어떤 부분에서 사서쌤이 나를 떠올린걸까? 궁금해졌다.


소설은 추천인의 말대로 잔잔했지만, 내게는 지독한 연애소설이었다.
여러 명이 등장하지만 예진, 도원, 호계, 재인이 주요한 주인공이다.
예진의 도원을 향한 마음, 호계의 예진을 향한 마음이 지난 날의 나를 떠올리게 했고,
도원의 예진을 향한 마음, 호계의 정아를 향한 마음이 그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재인의 가족을 향한 마음 곳곳에서도 내가 보였다.
그렇게 공감되는 조각들이 나올때면 찰칵찍어 ‘프리즘’ 앨범에 따로 저장해두었는데, 작가의 말까지 다 읽고 나니 저장된 사진은 56장이었다.


관계를 끊어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누군가에겐 한철이지만, 누군가에겐 영원일 수 있다.(마음은 이렇게나 엇갈린다.)
새로운 세상으로 자신을 확장해나가게 만드는 것이 다름 아닌 사랑이며, 이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라는 것을 배웠다.


어이없고 허무하고도 찬란하며 위대한 사랑이란 감정이
앞으로도 수없이 나를 흔들겠지만
그리고 무지 아프겠지만...
잘해낼거라는, 그를 통해 성장할거라는 다짐은 아직 내겐 너무 아픈 것 같다.
지금은 여기까지!



햇빛, 공기, 바람이 관통하는, 보랏빛이 잘 어울리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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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 예전엔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러기엔 너무 나이게 들어버렸다. 그래서 점점 우연이나 운이라는 걸 더 믿게 되어버린 건지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도 그렇다.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저 우연한 것, (생략)

p.12-13 이 일은 예진에게 아주 이상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단지 그날의 사고가 다리에 지워지지 않는 연갈색 연필 모양 상흔을 남겨서만은 아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애정을 쏟았는데 돌아오는 건 도리어 상처와 아픔이라니. 그때 느낀 감정은 어른의 언어로는 배신감이었다. 너무 날카롭고 아름다운 건 결국 속성을 뒤바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걸까.

 

 

p.28 열정은 있었지만, 순종과 관용은 있었지만 마음속의 선 안쪽에 수민을 한 번도 들여놓은 적이 없다. 그리고 그는 이제 최선을 다해 도망치려 하고 있다. 울타리를 치고, 상대의 상처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합리화하면서.

 

 

p.79 외롭다. 이 감정은 내 안에 있는 것. 

그런데 왜 밖에서만 답을 찾으려 할까.

 

 

p.88 미소가 곁들여진 완전한 응시. 좋아한다는 건 저런 거구나. 그런데 또 하나, 재인은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여주인공을 바라보는 호계의 눈빛. 다른 곳을 보다가도 여자에게 자석처럼 꽂히는 눈길의 방향. 재인은 새어나오려는 미소를 잠그느라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맴돌고 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정작 호계 씨는 아직 자신의 감정을 누치채지 못한 걸 같네. 용케들 이런 감정으로, 이런 표정들을 짓고 사는구나.

 

 

p.129 "호계 씨는 누구 좋아한 적 없어? 깊이, 오랫동안 말야." 

재인이 던진 가벼운 물음에 호계는 대답할 수 없었다. 타격감이 느껴지는 질문이라 행동을 멈췄을 뿐이다.

"누군가를 좋아할 기회가 온다면, 피하지 말아봐. 내가 하기엔 우스운 말이겠지만, 가치 있는 일이야."

 

 

p.143-144 재인은 어떤 종류의 나쁜 생각이었느냐고 묻는 대신 어른스럽게 말한다.

"지금은 지금일 뿐이야."

끝은 올 것이다. 그러나 느낄 수 있는 것은 현재뿐이다. 도원은 현재의 끝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멀리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p.148 행복했던 순간들은 왜 과거가 되면 슬퍼지고 마는 걸까. 사랑도 영원도 거짓된 명제임이 드러났을 뿐이다.

 

 

p.154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엉망진창인 하루를 겪은 재인의 마음은 황폐하기 짝이 없다. 오늘 하루 잘 지냈어? 응, 왠지 힘든 하루였네. 위로가 필요한 건가? 어쩌면. 간단한 몇 마디에 도원이 그녀의 집 앞에 서 있다. (중략) 우연히 고개를 돌려 재인을 발견한 도원의 눈이 촛불 켜진 듯 빛난다. 자신을 향한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재인은 달려가 도원을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그 충격에 반 발 물러난 도원이 한 박자 늦게 재인의 몸에 팔을 두른다. 천천히 온기가 한기를 밀어낸다.

포장을 벗거내고, 마음에 깃든 숱한 어둠의 조각들을 내보여도 자신을 향한 도원의 눈빛은 지속될 수 있을까. 절대로,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틈 없이 밀착한 도원의 품에서 재인의 비밀은 한층 더 깊어진다. 두터운 비밀엔 그늘이 스민다. 재인은 그 그늘을 묻어둔 채, 빛을 그리듯 도원을 그러안고 있었다.

 

 

p.180 "신경쓰지 마요. 끊어질 관계니까 끊어진 거죠." 

(중략) "저도 끊는 건 잘해요. 연결되는 걸 잘 못해서 그렇지."

"그래? 난 반대인데." 

그러자 호계가 재인을 바라봤다.

"끊어야 될 건 얼른 끊어버려요. 안 그러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요."

 

p.207 "방금 한 말, 내 마음을 무시하는 말이잖아요. 오빠가 좋은 사람이든 아니든 그건 오빠 판단이지 제 판단이 아니고요. 오빠 좋아하는 마음은 내 껀데 그 마음까지 오빠 마음대로 비난하지 마시라고요. 그러니까 그런 거 말고 차라리 솔직하게 얘기해요."

(중략) "바보네, 오빠도."

"본 지 오래됐거든. 실수를 해서."

"보고 싶어요?"

"응."

정아가 호계를 쏘아봤다.

"이제 그만해요. 솔직하게 말하랬지 누가 사람 바보로 만들래요?"

"난 네가 솔직하게 말하라고 해서......." 

(중략) 호계는 작아져가는 정아의 굳은 어깨를 보며 반문했다. 그 당돌한 말투와 고집스런 걸음이 부럽기도 했다. 누군가에 대한 마음을 속이지 않고 말하고 표현할 수 있는 용기가.

(중략)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호계의 마음에 정아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정아의 말대로, 마음의 방향은 자신만의 것이니까 잔인해도 어쩔 수가 없는 거다.

 

 

p.210 나는 누구와 연결돼 있을까.

(중략) 전에는 연애나 사랑이 의미 없이 흔해 빠진 거라 생각했다. 허나 이제 호계는 사람 사이에 맺는 관계라는 건 자기 자신이 확장되는 것임을 깨닫는 중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연결될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단 하나, 언제고 끊어질 수 있는 관계를 수없이 맺으며 살아가게 될 거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화폭을 채운 사람의 수가 많아져도 호계가 바라는 답은, 그가 연결되고 싶은 단 한 사람의 이름은 결코 바뀌지 않는 채 또렷해지기만 한다.

 

 

p.226 엄마는 톡 치면 동그랗게 말리는 공벌레처럼 단단하게 버틴 채 화가 날 때는 화가 난 대로, 풀렸을 때는 풀린 대로 감정을 여과 없이 분출했다. 엄마의 머릿속 회로들은 점점 오류를 범해가고 판단의 기준은 오로지 스스로의 감정이 되며 몸은 나날이 쇠약해져간다.

 

 

p.231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한때 소중하고 가까웠던 것들은 다 사라졌다. 재인은 그녀가 늘 실패하던 것에 성공했다. 연결되지 낳고 끊어내는 것을. 그러므로 그녀는 이제 백지처럼 결백한 영혼을 지닌 새 사람이다.

 

 

p.261 다시 깊은 내면에서 예진은 기다린다. 기대하고 고대한다. 갈망하고 염원한다. 아름다워도 상처받아도, 아파서 후회해도 사랑이란 건 멈춰지지가 않는다. 사랑의 속성이 있다면 시작한다는 것, 끝난다는 것. 불타오르고 희미해져 꺼진다는 것. 그리고 또다시 다른 얼굴로 시작된다는 것. 그 끊임없는 사이클을 살아 있는 내내 온간다는 것.

그렇게 원하든 원치 않든 사랑은 영원히 계속된다. 뜨거운 도시의 거리 위에서, 한겨울에도 늘 여름인 마음속에서, 태양이 녹아 없어질 때까지, 우주가 점이 되어 소멸하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