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 서점에 들렸다가 신간코너에서 발견하곤
앉은 자리에서 한 챕터를 후루룩 다 읽어버린 소설집이었다.
나중에 꼭 다시 읽어야지 했던 게 1년이 지났다.
분명 화자가 남자인 줄 알고 읽어내려가는데 남자와 키스를 하는 장면이 나와서
놀란 마음으로 앞장을 다시 뒤져서 화자가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이 소설은 동성애를 다루고 있는 퀴어 소설이었다.
사실 지금 '퀴어'라는 단어를 자판으로 치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 의미를 잘 몰라 초록창에 검색을 해본다.
'퀴어'란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포괄적인 단어'.
하지만 내게는 이 소설이 어렵고도 가슴에 와 닿았는데,
그건 낯선 퀴어 소설이라서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사랑. 관계. 사람.
올 한 해 내가 가장 골몰해온,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머릿 속을 가득 채웠던 주제였다.
우리의 관계는 쉬이 규정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늘 의문이고 고민하고 노력했다.
그 사람이 뭐길래 하루에도 수십번 수백번 널뛰기를 했고 울고 웃기를 반복했다.
나를 비이성적이고 이상하게 만드는 그 현상을 사랑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 소설집은 단편 소설집이 아닌 연작 소설집이다.
연작 소설은 처음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단편 소설보단 이게 좋다.
단편 소설은 한껏 몰입해서 빠져들라치면 끝나버리고, 이후의 이야기들을 알 수 없어 아쉬웠는데,
연작 소설은 앞서 등장했던 인물들이 생명을 이어가며 툭툭 튀어나오는 게 재미있고 반가웠다.
소설집은
재희 / 우럭 한점 우주의 맛 / 대도시의 사랑법 / 늦은 우기의 바캉스
총 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서점에서 순식간에 빨려들어가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던 「재희」가 가장 좋았다.
정조 관념이 부족한 이성애자 재희에게 영은 스토커를 막아줄 든든한 울타리였고,
똥꼬충이라 멸시 받는 동성애자 영에게 재희는 좋은 핑계가 돼주었다.
미국산 냉동 블루베리와 말보로 레드로 대유된 그들의 관계가 냉동실 장면과 함께 고스란히 머릿 속에 그려졌고,
재희가 떠나고 블루베리가 아닌 보랏빛 얼음 조각만이 떨어져나왔을 땐 (확신할 순 없지만) 내 마음도 영의 마음과 꼭 같았다.
두 번째로 좋았던 건 「대도시의 사랑법」.
규호와 영처럼 새벽길을 걷고 싶고, 낙산공원에 가고 싶고, 물을 쏟아버린 도화지처럼 쭈굴쭈굴한 하늘을 덮고 길 바닥에 누워보고 싶다.
"그냥 너랑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다는 거. 그게 좋"은 누군가와 함께 꼭꼭 그러고만 싶다.
주택 청약 당첨이니, 포르쉐니, 첫 책 대박과 같은 것들을 다 제치고 풍등에 남았던 '규호'를
'카일리'로 인해 홀로 떠나보내야 했을, 그리고 늦은 우기에도 비가 오는 것처럼 다 늦은 후에도 눈물을 흘렸던, 그리고 어딜가나 규호를 떠올렸던 영의 마음이
「늦은 우기의 바캉스」에서 하비비 이야기와 교차되어 전개된 이야기 속에 오롯이 전해졌다.
그리고 사실은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에서 마음에 와 닿다 못해 내 마음을 투영한 듯했던 활자들이 쏟아져나왔다.
어째서일까.
모양은 다 달라도 그 본질은 같기 때문에 이다지도 닮아있는 걸까?
p.113 도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세상천지에 가장 남자답고 매력적인 사람이며, 나는 그냥 게이스러운 게 몹시 티 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꼰대 디나이얼 게이 같은 점이 소름 끼치게 싫었지만 그런 그에게 정신없이 빠져드는 내 마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를 알기 위해, 나아가 그에게 빠져드는 나 자신의 마음을 알기 위해, 그 모순을 해석하기 위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하는 모든 것들을 속속들이 관찰했고 기록했다. 천년만년 학위논문을 쓰는 대학원생처럼. 절박하고 가련하게.
p.122 나의 정치적인 무지가 부끄러웠다기보다는 그가 멍청하고 생각 없는 내 본연의 모습에 질색할까봐, 그래서 다시는 나를 봐주지 않을까봐 두려웠다. 당시의 나는 어떻게 하면 그가 나를 좋아하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데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고, 필요하다면 나의 가치관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다.
p.152 나는 권태를 딛고 또다시 그에게 내 일상의 지분을 모두 내어주게 되었다. 눈을 뜨면 핸드폰을 든 채 그에게서 연락이 올까, 최선을 다해 기다렸으며 핸드폰을 배개맡에 둔 채 눈을 감아도 그의 꿈을 꿨다. 오직 단 하나의 질문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누구이며, 우리는 무슨 관계일까.
그와 만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삶을 알아갈수록 그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연했다. 애초에 그는 나와 뭔가를 맞출 생각이 없었고, 다만 아무도 없는 칠흑 같은 밤마다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첫하는 어린애인 나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고 나와 몸을 섞는 일을 즐거워했을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나를 바꾸고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여겼으나, 불행히도 나는 누군가에 의해 쉽게 바뀌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에 젖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많았다.
p.153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고 일방적인 연락이었다. 화가 나기보다는 왈칵 반가워하는 내 마음이 싫었지만 그 마을을 멈출 수는 없었다. 눈물이 고였다. 그가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될수록 나는 더 그가 알고 싶어졌고, 그를 가지고 싶어졌다.
p.169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가.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
아름다운 시절은 찰나에 불과하고, 결국 모든 것들은 등을 돌리고 떠나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이 책과 이 책을 읽으며 오버랲 되었던 내 일상의 조각들을 통해 절절히 배우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순간 순간 행복이라 여겨지는 찰나들도 슬프게 느껴질 것만 같다.
결국엔 나중에 뒤돌아보며 그리워해야 할 순간이자, 먼지처럼 사라지고 말 순간들일테니까.
영원한 건 없다지만, 정말 영원한 건 없다지만...
오늘 책상 정리를 하며 그가 주었던 홍삼 젤리를 내다버렸다.
그는 기억도 못할 젤리겠지만, 내겐 젤리를 건냈을 마음이 보여 쉬이 먹거나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가 무엇인지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의문만 던져주는 이 관계는 더 이상 내가 감내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결단이 섰다.
나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내 마음을 담보로 무례하게만 구는 그를 이제 더 이상 내 울타리 속에 두지 않기로 한다.
찰나의 아름다웠던 순간은 이미 2019년에 끝났고, 그 순간들을 그리워했던 시기도 2020년 10월부로 끝나고,
조각조각나 먼지로만 남은, 나만이 곱씹고 있었을 추억들을 털어내며, 멀어지는 뒷모습에 손을 흔들어본다. 힘차게.
정말 많이 좋아했지만, 내 마음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그에게. 안녕~.
p.326 어떤 사랑은 자신을 텅 비워내는 무력감과 절망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이 사랑이 자신을 얼마나 외롭게 하는 동시에 파괴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음에도 자신을 반번만이라도 있는 그대로 바라봐줄 것을 비통하게 애원하기를 멈출 수 없다는 것.
(해설 「멜랑콜리 퀴어 지리학」 _강지희)
p.339 글을 쓸 때 (혹은 일상을 살아갈 때) 홀로 먼지 속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막막한 기분이 들 때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손에 뭔가 닿은 것처럼 온기가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감히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말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금 주먹을 꽉 쥔 채 이 사소한 온기를 껴안을 수밖에 없다. 내 삶을,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오롯이 나로서 이 삶을 살아내기 위해. (작가의 말)
p.s. 화자가 지칭하는 '자소설'을 쓰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소설 속에 등장한다.
그래서 당연히... 화자, 즉 작가 본인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자소설이라 생각했는데,
하비비에게 소개한 화자 이름도 '높은 곳에서 빛나다'라는 뜻을 가진 '상영'이라서... 의심도 안했는데,
"소설 속 지명은 사실을 기초로 하고 있느나, 그 밖의 인물이나 사건은 모두 허구다."라고 책 맨 끝, 작은 글씨로 쓰여져 있다.
흠. 이미 너무 몰입해버렸는데. 작자의 자전적 이야긴줄 알았는데. 이 말을 믿어도 될까? 헷갈린다.
'교실 밖 이야기 > Booketlist' 카테고리의 다른 글
09. 프리즘/손원평 지음 (0) | 2020.11.15 |
---|---|
08.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0) | 2020.11.03 |
06. 아무튼, 여름/김신회 지음 (0) | 2020.09.06 |
05. 일의 기쁨과 슬픔/장류진 지음 (2) | 2020.08.19 |
04. 혹시 이 세상이 손바닥만 한 스노볼은 아닐까/조미정 지음 (0) | 2020.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