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투버 김겨울님의 추천,
https://youtu.be/CUdMARO-fQE
(겨울님 말씀대로,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하셨다면 이 글을 읽어내려가지 마십시오!)
그리고 과학 분야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와 있어 읽게 된 책.
부제 ‘사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띠지에 적힌 ‘책의 모양을 한 작은 경이’라는 찬사에 책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작가는 과학 전문 기자이고, 이 책은 그녀의 논픽션 데뷔작이라고 한다.
non-fiction, 소설이 아님에도 초반에는 자꾸 소설인 것 마냥 착각이 들었다.
'데이비드 조던'이라는 사람이 사뭇 허구의 인물 같다는 생각에서 였나보다.
마침 나도 삶의 방향성이나 삶의 의미, 삶의 질서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시기라 "타인의 삶에서 안내를 받고 싶어 하는" 화자의 여정에 기꺼이 함께 하고팠다.
화자는 과학자인 아버지 밑에서 어릴 때부터 '열역학 제2법칙'은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익히 배워왔다.
엔트로피는 증가하기만 할 뿐,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줄어드는 일은 없다고 말이다.
똑똑한 인간은 이 진리를 받아들인다.
똑똑한 인간은 이 진리에 맞서 싸우려 하지 않는다. (p.16)
"인생의 의미가 뭐예요?"
(...)
마치 내가 살아오는 내내, 그 질문을 할 순간만을 열렬히 기다려왔다는 듯 아버지는 내게 인생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통보했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
(...)
그건 마치 이 세상을 덮고 있던, 깃털을 넣어 만든 커다란 이불을 빼앗긴 느낌이었다.
'혼돈'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라고 아버지는 내게 알려주었다. 혼돈이라는 막무가내인 힘의 거대한 소용돌이, 그것이야말로 우연히 우리를 만든 것이자 언제라도 우리를 파괴할 힘이라고 말이다. "혼돈은 우리의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 우리의 꿈, 우리의 의도, 우리의 가장 고결한 행동도. 절대 잊지 마라." (p.54-55)
그러한 의미에서 "혼돈"에 맞서 우직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이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전기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고심하고 있는 것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화자도 그런 기대를 품고 그녀의 여정을 시작했으리라...
어쩌면 그는 무언가를, 끈질김에 관한 것이든, 목적에 관한 것이든, 계속 나아가는 방법에 관한 것이든 내가 알아야 할 뭔가를 찾아낸 것인지도 몰랐다. (p.18)
페니키스 섬과 '아가시'로부터 시작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분류학자로서의 일생은
화재와 지진 속에서 파괴되거나 무너져도 결코 굴하거나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는가 하는 생각을 붙잡고 있지 않았다. (p.78)
데이비드는 살면서 언제부턴가 "낙천성의 방패"를 갖추게 된 것 같다는 말로 설명했다.
(...)
"나는 이미 지나간 불운에 대해서는 절대 근심하지 않는다."라고 데이비드는 설명한다. (p.80)
"활동적인 야외 생활과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건강과 함께" "영혼의 고통은 사라진다."
(...)
"그 어디에도 바로 여기, 지금, 오늘만큼 하늘이 파랗고 풀밭이 푸르고 햇빛이 밝고 그늘이 반갑게 맞이해주는 곳은 없다." (p.127)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창조하기 시작한 이래, 사람이 노력해서 이룬 결과가 그토록 처참하게 파괴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엄청난 규모의 재앙 앞에서 그렇게 푸념하지 않는 인간을 만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 왜냐하면 결국 살아남는 것은 사람이고,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도 사람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불에 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그 지진과 화재가 준 교훈이다. 그가 지은 집은 무너지기 쉬운 카드로 지은 집이지만, 그는 집 밖에 서 있고 다시 집을 지을 수 있다.
(...)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보다 더 위대하다. (p.132-133)
"그 답을 찾으려는 필사적인 마음에 나는 계속 책을 읽으며"(p.128)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행한, 그의 인생에서 본받을 생각과 행동들을 밑줄치기 바빴다.
그러나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p.133),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은 반전된다!
그 이후로는 겉잡을 수 없이 이 책에 빠져들었다.
뭐야? 이제껏 견지했던 데이비드에 대한 화자의 관점(인생의 안내자)은 어떻게 되는거지?
잘 따라가고 있던 나는 또 어떡하나? 이게 무슨 일이야?
데이비드가 뭘 잘못한거지? 구구절절 옳은 말들(sound body, sound mind, 지나간 일에 대해 집착, 근심 말 것, 낙천성, 긍정의 효과...)만 했는데.. 분명 그의 일생과 업적은 칭송받을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뭘까?
그 이후 이어지는 데이비드의 업적 뒤에 숨겨진 이면들은 충격적이었다.
가장 큰 충격은 조수웅덩이 틈새로 들어가 좀처럼 잡기 어려운 아주 성가진 물고기를 잡을 때 그가 즐겨 쓰는 방법..!
그 구절을 읽을 때 가슴이 쿵! 내려앉았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ㅎㄷㄷ
두 번째 큰 충격은 우생학. 그 최전방에는 미국이 있었고, 일부 우생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부적합자'에 대한 불임화가 '공공복지'로서 이루어졌다는 것.
오싹했다. 그 잔인성과 무자비함이. 그 추락의 무지막지한 깊이와 그 파괴적 광란의 크기가. 토할 것 같았다. 내가 모델로 삼으려 했던 자는 결국 이런 악당이었던 것이다. (p.201)
데이비드는 공개적으로는 자기기만을 그토록 공격했지만 사적으로는, 특히 시련의 시기에는 더욱더 자기기만에 의존했던 듯하다.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긍정적 착각은 견제하지 않고 내버려둘 경우 그 착각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할 수 있는 사악한 힘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경고한 그 심리학자들의 말이 옳았던 것 같다. (p.202)
그것은 지독히도 방향 감각을 앗아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혼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너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진실을 흘낏 엿본 바로 그 느낌일 것이다.
그 사다리가 데이비드에게 준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의 해독제. 하나의 거점. 중요성이라는 사랑스럽고 따스한 느낌.
(...) 바로 그 때문에 그를 경멸했음에도 어느 차원에서는 나 역시 그가 갈망한 것과 똑같은 것을 갈망했다. (p.207)
나는 탈출하려고 그토록 애써온 지구로 다시 돌아왔다.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사명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강하든, 얼마나 열심히 뉘우치든, 어떤 피난처도 약속도 주지 않는 황량한 지구로.
(...) 혼돈을 이길 방법은 없고,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보장해주는 안내자도, 지름길도, 마법의 주문 따위도 없다. (p.208)
데이비드가 만들어낸 질서, 사다리와 그 사다리 맨 꼭대기에 인간을 두기 위해 그가 행했던 끔찍한 일들을 알게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혼돈'이라는 원점으로 돌아온다. 자연과 우주의 '혼돈' 앞에서 '나'라는 인간은 미물,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하다. 내가 나의 인생에 유일한, 가장 특별한 주인공이라 여기고, 혼돈에 맞서보려고 했던, 그래서 혼돈에 맞서온 역사를 가진 인물을 안내자로 삼으려 했던 의지가 모두 사그라든다.
화자는 그렇게 길을 잃는 것처럼 보였으나, 과거 주정부에 의해 불임화를 당했던 애나, 그리고 그녀와 함께 살고 있는 메리에게서 운명처럼 답을 찾는다.
천천히 그것이 초점 속으로 들어왔다.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이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그물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
(...) 그래, 이런 것. 이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죽는 것과 사는 것의 차이. 그게 아무 가치가 없다고? (p.226)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 바로 그 한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 좋은 과학일 할 일은 (...)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p.227)
이 대목에서 나도 환희에 차올랐다. '내가 중요하다'는 듣고싶었던 말을 들어서일까.. 내게도 작지만 소중한 그물망이 있음을 느껴서일까..
'나'라는 인간은 자연과 우주에 비하면 한 없이 작은 존재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이 세상 전부인 존재일 수 있다. 나를 보는 관점에 따라 나는 어떤 존재든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를 알아주는 '지음'을 곁에 두는 것이 중요하며, 나 또한 나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고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야한다.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변명도, 죄도 아니다. (p.228)
이 중요한 교훈만으로 행복했는데, 데이비드 조던에 대한 진짜! 결말이 남아있었다.
이 책의 제목의 궁극적 이유...
다름 아닌 분류학자들이 발견한 '어류'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정말 충격적이었다.
비늘이라는 외양과 물이라는 서식지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어류'라는 동일 범주로 넣은 수많은 생물들은 사실 따져보면 서로 다른 진화적 관계를 갖는 온갖 종류의 생물들이었던 것이다..!
"누가 누와 가장 가까운 관계인가?"라는 원칙을 바탕으로 생물들을 분류한 분기학자들에 따르면 물 속에 살고, 비늘이 있는 생물들을 모두 한 범주로 넣을 수 없고, 따라서 과거 물 속에 살고, 비늘이 있는 생물들의 범주인 '어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책 제목의 '물고기', Fish는 물고기 한 마리, 한 마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종, 즉 '어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물고기'는 분명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체인데.. 무슨 소리인가.. 철학적 이야길하려나 했는데.... 그게 아니라 진짜 물고기 Fish(어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통괘한 기분!!!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류"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에게 너무나도 소중했던 그 생물의 범주, 그가 역경의 시간이 닥쳐올 때마다 의지했던 범주, 그가 명료히 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 범주는 결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p.242)
저 밖, 혼돈의 차가운 수학 속에 결국 일종의 우주적 정의가 존재한다는 판타지 말이다. (p.246)
책을 다 읽고 나서 띠지에 적혀 있었던 "다른 세계는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 안에 있다."라는 글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요즘 자주 고등학교 때의 나를 떠올린다. 그때 그 소녀가 꿈꿨던 삶은 지금과는 달랐다. 더 넓~은 세계에서 많은 것들을 경험하며 자유롭게 사는 모습, 근사한 나의 모습을 꿈꿨던 것 같다. 그 꿈들이 독서실에서 새벽 2시까지 독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때 꿈꿨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며 '내가 원했던 삶은 이런 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삶이란 내가 보는 관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 절망과 후회로 가득한 세계를 창조할지, 희망과 감사, 그리고 행복으로 채워진 세계를 창조할지는 오롯이 나에게 달렸다. 그러기 위해선 세계를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 내가 '원했던 삶'이라고 정의했던 범주를 무너뜨릴 줄도 알아야 한다.
이건 내가 그려왔던 인생이 아니었다. (...) 그러나 이건 내가 원하는 인생이다. 나는 범주를 부수고 나왔다. 자연이 프린트된 커튼 뒤를 들춰보았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무한한 가능성의 장소를 보았다. 모든 범주는 상상의 산물이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느낌이었다. (p.262)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p.263-264)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화자가 여정을 시작한 이유도, 그 여정도, 여정을 마치고 나서 얻은 교훈도 모두 마음에 든다.
화자의 표현력도 정말 좋았다.
얻은 것이 많은 책이다-.
p.s. 이 책이 출간된 후 스탠퍼드와 인디애나 대학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름이 붙은 건물의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말 끝까지!! 즐거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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