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기말고사 끝나면 방학 전까지 책만 읽을거예요!"
방학이면 기숙학원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이는 우리 학교 아이들 중 한 아이가 시험 이틀 전 내게 호기롭게 전한 말이다. 교사라는 것이 부끄럽도록 책을 멀리해오던 나는 그 아이의 말에 왠지 책 추천 같은 것에 사명감을 느끼고는 물리를 좋아하는 고등학생 수준의 좋은 책을 찾아나선다.
인터넷 검색과 동료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내가 선정한 책은 김상욱 교수의 『떨림과 울림』이었다. 목차의 엔트로피 파트는 화학교사의 책 추천에 명분을 더해주었다.
인간은 울림이다. 우리는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한다.
...중략...
우리는 다른 이의 떨림에 울림으로 답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나의 울림이 또 다른 떨림이 되어 새로운 울림으로 보답받기를 바란다.
이렇게 인간은 울림이고 떨림이다.
『떨림과 울림』 프롤로그 中
저자는 물리학과 인문학을 참 적절히 잘 섞어 놓았다. 이과라기엔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문과라기엔 과학에 눈이 반짝이는 어중간한 인간인 나를 떨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물리라는 과목을 참 좋아했다. 하지만 아무리 수업을 열심히 듣고 공식을 다 외워도 문제를 풀 수 없었다. 물리를 잘하는 친구들이 가진 물리 '머리'나 직관이 부족했던 탓이었을까?
물리 선생님께서 나에게 "OO이는 아직도 16세기에 머물러있어요~"라고 농담처럼 던진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일명 '물포자'의 길을 걸어온지 어언 10년. 고등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게 되면서 기초 과학인 물리는 화학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읽는 중간 중간 사실 모르는 내용도 많고, 우리 물리 친구들에게 물어가며 이해한 부분도 있었지만 간만에 열여덟로 돌아가 눈을 반짝이며 학구열을 발산했다.
'모든 사물의 이치'라는 뜻에 걸맞게 물리는 기본 입자부터 우주까지 모든 것의 근원과 이유, 그 의미를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지만 결국 물리학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메세지는 우주는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 우주에는 어떠한 의미도 의도도 목적도 없다고 이야기해준다.
의미나 가치는 인간이 만든 상상의 산물이다. 우주에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는 없다.
그렇지만 인간은 의미 없는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존재다.
비록 그 의미라는 것이 상상의 산물에 불과할지라도 그렇게 사는 게 인간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게 인간이다.
『떨림과 울림』 4부 中
앞서 등장했던 아이가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게 될 미래 사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역량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다. 발표 말미에 인공지능 로봇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점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것은 바로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과 다르게 "모른다."라고 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엄청난 충격이었고 그러한 발상이 경이로웠다.
필자가 과학자로 훈련을 받는 동안, 뼈에 사무치게 배운 것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태도였다.
모를 때 아는 체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다.
또한 내가 안다고 할 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질적 증거를 들어가며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우리는 이것을 과학적 태도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사고방식이다.
...중략...
이처럼 과학은 무지를 인정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무지를 인정한다는 것은 아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떨림과 울림』 부록 中
교사들은 1년마다 학생과 학부모, 동료 교사들에게 교원평가를 받는다. 자유 서술식 문항에서는 나에게 달린 코멘트를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수업 중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고 학생들에게 물어보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라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나의 무지를 긍정적으로 해석한 것이 오히려 내게 감동으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부족하지만 나는 이미 무지를 인정하는 과학적 태도를 열심히 실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어쩌면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은 것은 물리학이 다루는 광범위한 지식이 아니라 열여덟의 내 모습처럼 무엇이든 호기심과 의문을 가지고 들여다보는 것, 함께 알아가고 생각해보는 것, 그리고 아이들과 소통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마지막 인용글은 책을 함께 읽은 우리 제자가 내게 준 소중한 편지에서 발췌하였다. 『떨림과 울림』을 엄청난 속도로 읽으며, 또 궁금한 것은 메모해가며, 자신이 나름대로 생각해본 것들을 펼쳐보일 때 짓던 행복한 표정과 아름다운 눈빛이 가능한 한 오래오래 함께하기를.
그리고 앞으로의 교직에서 과학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과학을 제대로 배웠다고 할 때 남는 것은, 과학적 탐구를 해본 경험이고
그 경험에서 익힌 과학적 사고 방식과 과학 지식의 본질에 대한 이해이다.
'교실 밖 이야기 > Booketlist' 카테고리의 다른 글
05. 일의 기쁨과 슬픔/장류진 지음 (2) | 2020.08.19 |
---|---|
04. 혹시 이 세상이 손바닥만 한 스노볼은 아닐까/조미정 지음 (0) | 2020.07.11 |
03.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심너울 지음 (0) | 2020.05.09 |
02. 조금 더 편해지고 싶어서 거리를 두는 중입니다/슈테파니 슈탈 지음 (0) | 2020.04.26 |
Booketlist (0) | 2020.04.18 |